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리뷰

16시간 동안 지켜본 애순의 삶
부모-자식-부모-자식 반복되는 세상
‘누구와 살아갈 것인가’ 고민하게 해

여느 때처럼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시청하고 있는데 배에서 뛰어내린 박보검(양관식)이 바다를 헤엄쳐 아이유(오애순)와 끌어안는 영상이 나왔다. 잠깐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 애틋해 보여 인상이 깊었다. 곧바로 어떤 작품인지 찾아보니 넷플릭스 16부작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였다.

이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것처럼 전광례-오애순-양금명으로 이어지는 제주 여성 3대의 가족사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다. 이들의 인생은 봄이라 해서 마냥 따뜻하지 않고 겨울이라 해서 마냥 춥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서로는 서로의 여름이 되고 가을엔 같이 털리는 나날을 보낸다.

특히 애순의 삶은 10대부터 늙을 때까지 거의 전부를 작품에서 보여준다. 딱 16시간만 보면 한 사람의 삶을 모두 관찰할 수 있다니! 그래서 더 이 작품이 보고 싶어졌다. 유튜브에서 잠깐 본, 관식을 미친 듯이 꽉 끌어안는 애순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그렇게 한자리에서 내리 16시간 동안 애순의 삶을 지켜봤다. 광례의 딸 애순은 어려서 엄마를 잃고, 커서 딸을 낳고, 또 자식을 잃는다. 좋을 때는 너무 좋고 싫을 때는 죽을 만큼 싫은 인생. 결코 평온하지는 않은 삶을 사는 애순이지만 시청자들이 보기에 애순의 삶은 결국 행복한 삶이다. 그 행복에는 항상 애순이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애순이가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 광례와 관식이, 금명이같은 사람들.

생생하고 진솔한 일상의 이야기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 사는 오애순(아이유)과 양관식(박보검)의 일생을 그린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 사는 오애순(아이유)과 양관식(박보검)의 일생을 그린다.

사람 간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면 시청자는 자연스레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애순이의 가족들이 주는 사랑을 보며 저마다의 가족을 떠올렸을 듯하다. 그 경험으로 인해 작품을 보며 더 울고, 더 웃는다. 가족 이야기는 장점이 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똑같은 상황을 겪어본 건 아니지만, 시청자들은 이들이 느끼는 감정을 다른 것보다 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소중한 사람, 가까운 사람에 대한 감정은 누구나 겪어봤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렇게 얼굴이 퉁퉁 부을 때까지 서서도 울고 앉아서도 울고 누워서도 울었다. 작품을 다 봤을 땐 코 묻은 휴지 뭉치가 한 무덤 쌓일 정도였다.

가장 특별한 이야기는 보통의 이야기라는 말처럼 평범하고도 특별한 삶은 따뜻한 그리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 작품의 지향점이 딱 이거였다. 평범하지만 짙은 이야기. 시인이 되고 싶었던 애순이가 쉰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시는 잡지 <좋은생각>에 당선되었던 시였다. 보면서 반가웠다. 필자도 해당 잡지에 몇 번 글을 투고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잡지를 읽어본 사람으로서 작품 속 애순에게 딱 어울리는 잡지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해당 잡지의 ‘생활문예대상’에 투고를 해봤다. 온라인 투고를 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공모 선정 기준처럼 쓰여 있는 글귀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생생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이 작품이 글로 투고되었다면 딱 어울렸을 글귀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누구와 살 것인가로

금명은 제주에서 서울로 대학을 온다.
금명은 제주에서 서울로 대학을 온다.

작품을 보기 전 나도 모르게 가졌던 질문이 있다. 답을 얻지 못한 채 선명해졌다 희미해졌다만 반복하는 질문. 그건 바로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작품에서 보여주는 긴 삶에 끌렸던 것도 애순이가 대체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지 궁금해서였다. 필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작품 속 다른 삶을 보며 해답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작품을 보며 답을 찾았느냐고 물으면, 찾지 못했다 답한다. 대신 질문이 바뀌었다. 이 작품에서 어떻게 살지 답을 찾으려면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지’로 질문이 유지되면 안 된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누구와 같이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도 그럴 게 작품 속에서 애순은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 아내였다. 제주에서 서울로 대학을 간 금명이도 ‘학생’의 색채보다는 누군가의 딸이자 애인인 색채가 강했다. 이들의 행복은 가족 사이에 있기에 그려질 수 있는 거고 가족 없이 개인으로는 잘 존재하지 않는다.

평생을 서로를 위해 사는 애순이와 관식이를 보고 있자면 나도 저렇게 짝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삶을 살 것인지 이 작품을 보면서 고민하다 보면 당연하게 드는 결론이다. 애순이와 관식이는 서로가 있어야만 행복하기 때문이다. 둘 중 한 명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거나 육지로 떠나버리면 그들은 슬퍼서 운다.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바닷가로 달려 나가 악쓰며 울다가, 그 깊은 바다를 맨몸으로 헤엄쳐 만난다. 그 둘은 그래야 한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연애와 가족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에 갇혀

작품을 보다 보면 유명한 시 구절도 나오고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일들도 나온다. 시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잊을만하면 어디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시대극이라는 건가? 그러나 작품을 볼 때 이 시대는 등장인물들과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뉴스에서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오든 작품 속 등장인물들에게 중요한 건 이들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1990년대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가 데모를 해도 그것은 관식이 금명이를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장치가 될 뿐, 다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196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작품 속에서 그저 시간이 간다는 표현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흘러가는 것처럼. 항상 그랬듯이. 작품을 시청하는 나도 어떤 시대인지는 상관없이 그저 부모-자식-부모-자식으로 이어지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 안에 갇힌다. 그 안에서만 눈물 콧물 흘리며 행복과 삶에 대해 생각한다.

남는 건 여운과 두려움

중년의 애순(문소리)과 관식(박해준). 그리고 이들의 딸 금명(아이유).
중년의 애순(문소리)과 관식(박해준). 그리고 이들의 딸 금명(아이유).

그런데 16시간 동안 작품을 보고 있을 땐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작품 속에 폭싹 빠져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누구와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애순이처럼 행복해지려면 곁을 내고 마음을 내줄 사람을 확보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건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품을 끝까지 다 보고 바로 든 생각은 ‘늙기 싫다’ ‘나이 먹기 싫다’였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인데, 작품이 알려준 행복을 얻으려면 필자도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순이처럼 행복한 삶을 살려면 그래야하는데, 그 일에 자신이 없었기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작품을 다 보고 나니 마음에 허기가 졌다. 애순과 관식의 이야기가 끝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행복이란 결국 관계 속에 있다는 작품의 메시지를 받아들일수록 그 관계를 만들어갈 자신이 없는 나를 마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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