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2호 학술
누군가로부터 문자 톡을 받고, 그 내용에 가슴 떨리는 의미를 부여해 보며 설레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양자역학을 이해해볼 욕심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글로 써진 내용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 문자에는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이 정말 잘 표현된 것일까? 어떤 의미로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 설렌 마음으로 고민하는 이유는 문자 내용이 그 사람 마음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 아닌 다른 대상을 이해해보려는 인간의 본능은 여러 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인과성, 즉 변화하는 사건들이 따르는 듯 보이는 법칙을 꾸준하게 발견해왔다.
두 대의 자동차가 서로 마주 보고 같은 속도로 다가오면 한쪽 차에서 보면 다른 차가 마치 2배의 속력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확장하면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우주선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이때 자연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대성 이론으로 다시 정리해야 한다. 이 글은 상대성 이론에 관한 글이 아니니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단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이미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 데 필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만 지적하겠다.
휴일이면 학교로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정문이나 후문을 통해서만 들어 올 수 있다. 차가 학교로 들어왔다면 두 출입구 중 반드시 하나를 통과했다는 것을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을 확장해 2개의 구멍(슬릿)이 뚫려있는 벽을 작은 입자가 통과해 가는 실험을 생각해 보자. 입자는 벽을 뚫고 갈 수는 없는 상황이므로 벽을 지나왔다면 분명히 두 개의 슬릿 중 하나를 통과해서 온 것이다. 그런데 입자가 두 개의 슬릿 중 어느 한쪽만 지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과학자가 실험을 통해 밝혀낸 사실은 입자는 슬릿 중 어느 한쪽만 통과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곳을 모두 지나온다는 것이다. 자동차 한 대는 정문과 후문을 동시에 통과해 들어 올 수 없는데 하나의 입자는 어떻게 동시에 두 슬릿을 지나올 수 있을까?
자연과학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추론하여 얻어내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논리에 따라 자연을 교육시키지는 않는다. 우리의 기존 이해의 범주에서 새로운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그것이 불가능하면 우리 사고의 틀을 변화시켜야 한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우리의 사고 습관 중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버려야 할까?
우리가 어떤 입자의 운동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때는, 그 입자가 언제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때이다. 또한, 그 입자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외부에서 가해주는 힘으로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 조건과 주어진 힘을 알면 입자의 운동이 정확하게 기술되는 고전 역학의 체계를 어려서부터 배운 사람들은 고전역학이 자연과학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에서 따라야 하는 법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나를 벌하지는 않는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기본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객관적 증거에 따라 법이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서는 어떨까? 고전 역학적 세계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고전 역학의 세계에서는 입자에 대한 정보가 객관적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자연에 있는 입자가 사람들에게 측정되는 객관적 사실들에 근거한 법칙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입자들이 어떻게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운동하는지를 결정하는 방정식은 놀랍게도 입자들의 측정값들을 사용해서 만들 수 없으며, 오직 입자의 운동 가능성의 시간에 대한 변화로 주어진다. 입자들의 행동 가능성, 즉 행동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자연법칙이 작용하여 다른 입자를 만났을 때도 다른 입자의 행동 가능성과의 관계에 따라 법칙이 만들어진다.
가능성을 하나하나 일어나는 파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 자체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치밀하고 정확하게 수식적으로 완벽한 규칙 체계를 알아낸 것이다. 가능성을 검증하려는 어떤 사소한 노력도 존중되며, 아무것도 없는 진공에서 빛 하나보다 작은 요동도 그 가능성을 검증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굳이 관찰자인 사람이 검증에 필요하지 않고, 사람이 없는 자연계에서도 검증은 쉽게 이루어진다. 즉,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입자는 가능성이 지켜야 할 법칙을 만족하며 변화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 측정하면 그 가능성 중 하나를 오직 확률적으로 나타낼 뿐이다.
자동차는 정문 또는 후문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 곳으로 왔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의 문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벽에 있는 두 개의 슬릿을 통과한 입자는 어느 슬릿으로 통과해 왔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두 슬릿 중 어느 곳으로 왔는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 곳을 모두 지나와서 어느 곳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답은 있지만 내가 모르는 것이고, 입자는 두 곳을 모두 지나와 어느 슬릿으로 왔는지 결정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결정되지 못해 모르는 경우를 “묘른다”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해보자. 둘 중 하나의 슬릿으로 왔는데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 슬릿을 모두 지나왔기 때문에 “묘르는”상태로 두 슬릿을 통과했고 그 결과로 간섭무늬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단어를 사용하면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대상은 항상 “묘른”상태로 있고, 이 “묘른”상태의 변화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규칙을 따라 변하게 된다.
빛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가졌다는 의미는, 광자 한 개가 파동의 형태로 공간에 퍼져 있는데 광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묘르는” 상태이다. 물론 측정하면 확률적으로 어느 곳에선가 발견될 것이고 이렇게 발견될 때는 반개가 아니라 항상 한 개씩 입자로 발견된다는 의미이다. 0과 1의 중첩의 상태도 0과 1의 가능성을 지닌 “묘르는” 상태에 있고, 이 상태는 주어진 환경이 주는 제약조건 속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물론 가능성의 검증을 위해 실험하면 확률적으로 0 아니면 1이 될 것이다.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얽힘의 경우도 양자역학의 법칙은 가능성을 지닌 “묘르는” 상태에 작용하는 것을 인정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입자의 상태를 우리가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틀 속에 가두며 측정값들로 나타내려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다. 양자역학적 세계에서 입자는 객관적으로 표현되는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묘르는” 상태인 여러 가능성의 형태로 변화되어 간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낸 톡은 문자로 된 객관적 사실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모두 표현된 것은 아닐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모든 대상물도 우리에게 측정된 객관적 자료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객관적 자료로 규정되는 이해의 틀 속에서 만들어진 법칙을 따르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적 세계에서 입자들은 운동의 여러 가능성으로 표현되는 “묘르는” 상태로 변화되어 가며, 이러한 가능성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정확한 방정식(슈뢰딩거 방정식)을 만족시키며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입자에 대한 객관적 정보는 측정을 통해 확률적으로 주어지는 측정값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객관적으로 잘 정의된 틀 속에서 운동 방정식이 결정되는 고전 역학 세계와 다르게 양자역학 세계에서는 운동 가능성에 대해 슈뢰딩거 방정식이 주어지고, 변화하는 가능성의 객관적 표현은 측정에 의하여 얻어진다. 이 관점에서 양자역학적 세계관과 고전 역학적 세계관을 구별하여 볼 수 있다면 이곳저곳에서 들을 수 있는 여러 양자역학적 현상들을 들여다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